거리의 개념은 왜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가. 거리는 물리적 개념인가, 심리적 경험인가.
오랫동안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단위였다. 미터, 킬로미터, 혹은 '걸어서 10분 거리'처럼 명확히 측정되고 감각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우리는 그 거리를 몸으로 체감했고, 실제로 걸어가며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이 단순한 개념에 균열을 가져왔다. 이제 거리는 시간과 공간의 복합적인 감각, 나아가 심리적 거리감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상통화 기능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가족과 '눈앞에서 마주 보는' 듯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단순한 메시지 전송도 감정의 교류를 가능케 한다. 물리적으로는 멀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까운, 그런 관계가 생겨났다. 반대로,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디지털 기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 사이엔 심리적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진다. 거리의 기준이 몸에서 감정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팬데믹 기간 동안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비대면 회의가 일상이 되며 사람들은 같은 도시 안에서도 서로를 만나는 빈도가 줄었다. 하지만 화상회의 하나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서, 국경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이 과정에서 '거리'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위치보다 네트워크 속 연결의 강도로 측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는 단순한 측정값이 아니라, 감정과 접속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1. 지도 위의 거리, 체감되지 않는 현실
우리는 스마트폰 속 지도 앱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처럼 느낀다. 거리와 방향은 모두 화면 속에 나타나고, 경로는 자동으로 계산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어디까지가 먼가'에 대한 감각을 잃어간다. 단순히 도보 10분, 차량 30분, 대중교통 환승 한 번이면 되는 거리들은 더 이상 피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거리들이 실제로 체험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디지털 지도는 공간을 압축시킨다. 손가락을 오므리거나 벌리는 동작 하나로 도시 전체를 조망하거나, 미지의 골목길까지 파고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실제 걷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도를 통해 도달한 장소는 실재하지만, 그 거리감은 체험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익숙한 길조차 몸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한, '거리'는 단순히 지리적인 정보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데이터였다. 좋아하던 사람과 함께 걷던 거리, 특별한 일을 겪은 장소까지 그 길의 질감과 느낌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디지털 지도는 그것을 '경로'로만 기록한다. 감정은 사라지고, 거리의 질감은 평면화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도 속 거리와 실제 걷는 거리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그 거리의 '현실감'은 점점 증발하고 있다.
2. 낯선 거리가 사라진 시대
예전에는 새로운 장소를 간다는 것은 곧 낯설음을 경험하는 일이었다. 지도를 펴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때로는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일이 여행의 일부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길을 잃는다는 경험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점점 드물어진다. 실시간 위치 정보와 안내 음성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려준다. 이는 분명 편리한 변화지만, 그와 동시에 '낯선 거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설렘은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골목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치는 일,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한 만남이 생기는 일은 디지털 지도에선 잘 일어나지 않는다. 디지털 지도는 최적화된 경로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로는 종종 가장 효율적이지만, 가장 덜 흥미로운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리감의 상실은 곧 탐험의 상실이다.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낯선 장소에서 나를 시험해보는 방식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시험을 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거리를 통해 배우던 감각들 - 방향 감각, 공간 지각 능력, 주변 환경에 대한 집중력 - 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길이 단순히 '도달하는 경로'로 전락한 시대에, 거리는 더 이상 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3. 모호해진 거리 속에서 다시 거리를 배우기
이제 우리는 거리라는 개념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거리란 물리적이고 측정 가능한 수치일 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회복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은 분명 축복이지만, 동시에 감각의 무뎌짐을 가져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간과 나 사이에 어떤 ‘거리’가 있는지를 재인식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목적지 없는 산책, 지도 없이 길을 헤매는 경험, 미지의 골목을 향한 발걸음은 우리에게 ‘진짜 거리’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역시 단지 물리적 거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함께 있어도 멀게 느껴지는 거리, 멀리 있어도 가까운 사람들. 이런 심리적 거리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다.
디지털 기술은 거리 개념을 재정의했다. 이제 거리는 '접속 가능성'과 '심리적 거리감'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거리감각을 익혀야 한다. 기술이 모호하게 만든 거리 속에서, 진짜 관계와 진짜 공간 경험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거리, 혹은 새롭게 얻은 거리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거리 개념을 재정의했다. 이제 거리는 '접속 가능성'과 '심리적 거리감'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거리감각을 익혀야 한다. 기술이 모호하게 만든 거리 속에서, 진짜 관계와 진짜 공간 경험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거리, 혹은 새롭게 얻은 거리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실제로 이 새로운 거리 개념은 도시 설계와 공간 배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멀다’는 개념은 더 이상 물리적 거리를 뜻하지 않고,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 혹은 얼마나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집 근처에 공원이 있어도 이용률이 낮은 이유는 물리적 거리보다는 그 공간이 나에게 얼마나 '심리적으로 가까운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거리란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인식하고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개념이다. 디지털 기술은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공간 감각과 관계 방식을 다시 배워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